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앨리스 모드 메리 (문단 편집) === 결혼 생활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" [[파일:944431-1573127761.jpg|width=100%]]}}}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" [[파일:The_Hessian_family_in_1876.jpg|width=100%]]}}} || || [[1871년]] 가족초상화[* 세 아이들은 왼쪽부터 [[헤센의 빅토리아 공녀|빅토리아 공녀]], 프리드리히 공자, [[에른스트 루트비히|에른스트 루트비히 공자]]] || [[1875년]] 가족사진 || [[1863년]] 오빠 [[에드워드 7세|에드워드 왕세자]]와 [[덴마크의 알렉산드라|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]]의 결혼으로 [[영국]]을 방문한 앨리스는 그곳에서 첫 딸 [[헤센의 빅토리아 공녀|빅토리아]]를 낳았고, [[1864년]]에는 둘째 딸 [[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루이제 알릭스|엘리자베트]]를 낳았다. 직접 [[모유]]수유를 하길 원했던 그녀는 양육 방식에 있어 빅토리아 여왕과 갈등이 생겼고, 어머니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. 셋째 아이를 [[임신]] 중이던 [[1866년]], [[프로이센-오스트리아 전쟁]]이 발발하였다. [[헤센 대공국]]은 [[오스트리아 제국]]을 지지했기 때문에 언니 빅토리아 공주와는 대척점에 서게 되었다.[* 빅토리아 공주는 [[프로이센 왕국]]의 왕세자비였기 때문이다.] 남편 [[루트비히 4세(헤센)|루트비히 공자]]는 기사로 전쟁에 참가하였고, 아이들은 [[영국]]으로 보내졌다.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,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병원을 돕는 등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했다. 전쟁이 한창이던 그 해 7월, 앨리스는 셋째 딸 [[이레네 루이제 마리아 안나|이레네]]를 낳았다.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남편과 재회했으며 부상자들을 간호했다. 이때 친해진 사람이 바로 [[플로렌스 나이팅게일]]이다. [[플로렌스 나이팅게일|나이팅게일]]은 [[영국]]으로부터 앨리스에게 돈을 전해주었고, 앨리스는 간호를 하며 그녀의 조언을 따르곤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